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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스승과 대학교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4-02-0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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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Ph.D., Th.D.)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545‘5분 칼럼진행자


1948년에 개교한 대한신학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로부터 인준을 받아 야간신학교로 시작하였다. 평양신학교의 물줄기를 잇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교육에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선지동산이었다. 설립자 김치선 박사는 평양신학교와 일본고베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미국달라스신학교에서 우리나라 구약학 최초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당시 최고의 신학 학문과 영성 그리고 선진 교육의 목회자와 신학자로 한국교회를 이끌었으며 김구 선생이 새벽기도회를 나올 정도의 중심이었던 남대문교회 담임이었다. 대한신학교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대신대학을 거쳐 안양대학교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김치선 박사는 김세창 목사에게 신학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부도가 났고 교육자 김영실 총장이 학교를 인수하였다. 대신대학교가 신학을 중심으로 일반학과를 증설하여 종합대학으로 확장하면서 안양대학교로 변경하게 되었다.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였지만 기독교대학교의 정체성이 흔들렸고 기독교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은 재정이 어려운 학교를 대순진리회 성주회가 인수하였고 대진대학교, 중원대학교, 전국의 대진중고등학교와 함께 교육사업을 한다며 홈페이지에 기재하였다.

 

위와 같은 시점에 대한신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던 스승 최순직 박사가 너무 그립다. 그는 총신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한국교회에서 존경 받던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학교 경영권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김세창 목사에게 밀려 대한신학교에서 영구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후부터 대한신학교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교단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총회 인준으로 거리를 두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스승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사모를 회고하고자 한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순직 박사는 자주 검은 한복을 입고 신학교 강단에 서서 부드럽고 다정하게 강의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목에서는 분명한 어조로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목회자의 영성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신학생들도 갖기를 원했다. 그의 강의는 영혼구원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학생들의 개혁신학과 성화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박사는 1923316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로리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김치선 박사의 양아버지였으며 평생의 은인이었던 캐나다 선교사 영재영(Young)이 설립한 함흥 영생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43년 일제 강점기에 학도병 징집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화민국 해암공립영화 국민우국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중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신학교에 가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부모의 허락 없이 고국으로 들어와 19453월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하지만 신학을 시작한 일 년도 못되어 폐결핵 진단을 받았고 학교를 중퇴하고 요양을 하면서 결핵병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석 달 정도만 살 것이라는 시한부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산기슭의 격리된 오두막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냈다. 당시 최순직은 40가 넘는 결핵환자 보호소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사정을 들은 간호사가 보증을 서주어서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간호사는 틈틈이 찾아와 회복이 멀지 않다고 격려해 주었다. 최순직이 간호사의 말에 희망을 품게 되자 건강도 조금씩 차도가 보이게 되었다.

 

19506.25 한국전쟁을 피해 아픈 몸을 이끌고 그해 12월에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거제도에 정착하였다. 계룡산 기슭에서 병든 몸으로 다년간을 동굴에서 기도하며 생활하였다. 이북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평양신학교를 중퇴하였기에 1952년 총회신학교에 편입하여 방학 때는 목회를 하며 거제도에서 대구까지 통학을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55년 한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한양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에 전념하다가 19583월 대한신학교 학장이었던 김치선 박사의 차녀 김동화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19594월부터 대한신학교 서무과장과 시간강사로 시무를 시작하여 1968년부터 1975년까지는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 교수로 19812월부터는 방배동 총회신학교(현 백석대학교) 교수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 1999년에는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19991010일 자택에서 소천하여 미국 조지 워싱턴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

 

김동화 사모는 192825일 평양에서 김치선 목사와 이홍순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치선 박사를 따라 193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945년 경성사범학교 본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편입됨으로써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산부인과 의사에 의해 도저히 아기를 출산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던 김동화 사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를 출산하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어려운 국내 환경을 벗어나 1975년 미국으로 떠나 이민생활을 하다가 1992년 한국에서 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최순직 박사와 함께 생활을 하였다. 1999년 최순직 박사가 소천한 후 김동화 사모는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숙환으로 2020813일 육신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인생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던 김치선 박사, 김세창 박사, 그리고 김영실 총장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그 교단과 학교의 후대들이 겪게 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의 큰 상처로 남는다.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최순직 박사와 김동화 사모의 삶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았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에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며 생명의 말씀 속에서 위로를 받아 앞으로의 삶에 승리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은 예기치 못하는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필자도 안양대학교의 심각한 위기를 목도하면서 대한민국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했던 교육기관이 타종교 기관으로 예속되었다는 사실에 통탄한다. 바라기는 대한민국 건국 연도와 일치하였던 전통의 기독교 안양대학교가 설립 정신이 심각하게 훼손된 작금의 상황이 한국교회의 비극임을 직시한다. 하루 속히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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