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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원래 나의 전공이었다
황화진 목사, 강은교회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1-08-2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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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화진 목사, 강은교회
 

농업은 원래 나의 전공이었다. 태어나보니 외딴섬 강화 교동도. 그때는 정말 낙도(落島)였다. 물론 지금은 연육교도 건설되어 육지같이 다니니 낙도(落島) 아닌 낙도(樂島)이다. 전쟁 후 피폐해진 국토. 뭐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농촌이 기계화되고 과학화되었지만 그 당시는 오직 몸으로 때우던 시절이라 나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봄철 모내기할 땐 아직 발이 시린데 맨발로 논에 들어가 일하다 보면 거머리가 정강이에 붙어 내 피를 빨아먹고 있다. 한여름 건파 김매고 웃통 까고 콩밭 매다 보면 등어리가 햇볕에 데어 감자껍질 벗겨지듯 허물을 벗는다. 가을철 낫으로 벼 베기도 힘들었고 새벽 남포 불 켜놓고 타작일 시작하면 밤 10시나 돼야 일과가 끝났다. 나는 어리고 약해서 늘 고단함을 못 이겨 코피를 달고 살았다. 학교 갔다 와서는 책 보따리 팽개치고 바로 소 몰고 산으로 가서 소 풀 먹이는 일은 내게 주어진 일과였다. 겨울철에는 새끼 꼬고 작두로 소여물 썰고 기껏 놀이래야 구슬치기 제기차기 썰매타기 연 날리기 정도였다. 내가 운동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행운아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전거로 통학하던 시절이라 수백 대의 자전거가 학교 운동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때 익힌 자전거 실력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땐 그 섬에 인구가 3만여 명으로 바글바글했는데 지금은 3천여 명으로 썰렁하기만 하다. 그 섬에 고등학교가 신설되었다. 나는 농고 1회로 들어갔다. 몇 선배도 같이 입학하여 그냥 친구가 되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고등학교라도 들어가면 제법 괜찮은 축에 끼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 공부는 별로 안했다. 학교 분위기 자체가 면학 분위기와는 거리가 좀 멀었다. 국어 영어 정치경제사회 한문 등 상식적으로 필요할 것 같은 것들은 내가 스스로 공부해 뒀고 학교 성적은 적당히 받았다. 그때 신설 농고라 운동장 고르기, 염소 똥 치우기, 콩나물 길러서 시장에 내다 팔기 등등 일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경운기 타고 다니면서 기타 치며 신나게 노래 부르던 고교 시절의 추억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련하기만 하다.

그때 수원 농촌진흥청에 실습 나와 작물시험장에서 매일 벼 생육 조사 뜨고 서류 정리하고 직원한테 이유 없이 시달리고 잔심부름하고 그랬던 곳을 지금 매일 지나다니고 있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수원캠퍼스는는 요새 매일 나의 산책로이다. 서호저수지가 집에서 가까우니 거의 매일 가볍게 잠깐씩이라도 라이딩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한국왜성사과재배연구소에 취업하여 전지, 새 품종 개발하기, 접붙이기 등등 한동안 사과 전문가로 일을 했다. 역시 그때 활동했던 동네가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이니 그것 또한 묘한 인연이다.공부는 하고 싶으나 그럴 환경은 안 되고 대학 갈 실력 또한 전혀 안 되니 감히 꿈도 못 꾸었다. 거기서 당시 대학에 간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는 나중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서 학위의 길을 열었지만 말이다. 대학에 들어갈 때 하도 농사와 관련해서 살다 보니 농학이 행여 좀 쉽지 않을까 하고 농학과를 지망했는데 완전 계산 착오였다, 만만한 과목은 하나도 없었다. 어렵게 방송대 공부하느라 비지땀을 흘리던 일도 다 지나간 추억이다. 지금은 사이버대학도 많고 학점은행제라는 제도도 있어서 대학 나오기가 너무 쉬운 시대이다.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느껴 공부를 할 때도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아 주경야독하며 많은 고생을 했다. 여전히 학문에 대한 갈증과 또한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교육 활동에 대한 열망은 해소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나이도 먹고 목회사역이 우선이니 아쉽지만 다 뒤로하고 강은교회 사역에 올인하고 있다.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한 상태에서 벌써 내 나이도 이순을 넘어 고희를 바라보니 뒤돌아보면 많은 후회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 늘 서려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끓는 가슴은 여전하니 더 달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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