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비온디의 스포츠맨십과 욥의 탄식 사이에서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8-10 07:10
본문
올림픽 메달을 놓친 선수의 스포츠맨십을 예로 들며 개인의 억울함이 공동체의 기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일리가 있다. 미성숙한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 불평은 분명 공동체의 덕을 허무는 누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불평'과 '쓴 뿌리'를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풍성한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정직한 부르짖음, 즉 '탄식'을 신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장려한다. 시편의 3분의 1 이상이 탄식시이며,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고, 욥기는 고난받는 의인의 절규로 가득 차 있다. 욥은 자신의 고통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늘도 내게는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욥기 23:2-5). 만약 욥의 친구들이 오늘날의 '긍정주의' 논리를 따랐다면, 욥의 이 처절한 외침을 '공동체의 평화를 깨는 사소한 불평'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오히려 정직하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던 욥을 인정하셨다.
문제의 핵심은 '불평'과 '탄식'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의 부재에 있다. 맷 비온디의 패배는 개인적인 아쉬움의 영역에 속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겪는 억울함과 고통은 때로 불의와 죄악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억압받는 자의 신음, 불의에 희생된 자의 눈물을 '분위기를 망치는 불평'으로 폄하하는 것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잠재우고 공동체를 거짓된 평화 속에 안주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는 성도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탄식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함께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게 된다. 스포츠맨십의 덕목을 넘어, 욥의 정직한 탄식을 품어낼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공동체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정직한 부르짖음, 즉 '탄식'을 신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장려한다. 시편의 3분의 1 이상이 탄식시이며,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고, 욥기는 고난받는 의인의 절규로 가득 차 있다. 욥은 자신의 고통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늘도 내게는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욥기 23:2-5). 만약 욥의 친구들이 오늘날의 '긍정주의' 논리를 따랐다면, 욥의 이 처절한 외침을 '공동체의 평화를 깨는 사소한 불평'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고, 오히려 정직하게 자신의 고통을 토로했던 욥을 인정하셨다.
문제의 핵심은 '불평'과 '탄식'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의 부재에 있다. 맷 비온디의 패배는 개인적인 아쉬움의 영역에 속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겪는 억울함과 고통은 때로 불의와 죄악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억압받는 자의 신음, 불의에 희생된 자의 눈물을 '분위기를 망치는 불평'으로 폄하하는 것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잠재우고 공동체를 거짓된 평화 속에 안주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는 성도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탄식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함께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게 된다. 스포츠맨십의 덕목을 넘어, 욥의 정직한 탄식을 품어낼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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