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이라는 우상, 섬김의 도를 외면하는 교회에 고함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6-16 07:10
본문
국가의 진정한 위대함이 힘이 아닌 정의와 섬김에 있다는 제프 파운틴의 주장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 곧 ‘힘의 신화’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고대 로마부터 나치 독일, 소련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힘을 숭배했던 제국들이 결국 자신과 타인에게 저주가 되었음을 피로 증언한다. 그들은 더 넓은 영토, 더 강한 군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위대함’이라 정의했지만, 그 끝은 언제나 공허한 폐허와 지울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이는 단순히 정치나 국제관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의 핵심이며, 교회가 그 어떤 세속적 가치보다 첨예하게 맞서 싸워야 할 전선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 힘의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방식을 교묘하게 모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한 포장지로 감싸온 역사가 깊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헌금, 더 높은 사회적 명성을 얻기 위해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한 적은 없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위대함의 길은 세상의 그것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이 본문의 의미를 극적으로 조명한다. 대심문관은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거부하신 예수를 비판한다. 그는 인류에게 ‘빵’과 ‘기적’, 그리고 ‘권위’를 주어 그들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강변한다. 즉, 그는 교회가 세상의 힘을 장악하여 인류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섬김의 도를 통해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논리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 이 대심문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국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국가가 더 많은 힘을 갖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정의와 긍휼을 위해 사용하도록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교회가 먼저 힘의 우상을 파괴하고 섬김의 본을 보일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참된 위대함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 힘의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의 방식을 교묘하게 모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한 포장지로 감싸온 역사가 깊다. 더 큰 교회, 더 많은 헌금, 더 높은 사회적 명성을 얻기 위해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한 적은 없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위대함의 길은 세상의 그것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이 본문의 의미를 극적으로 조명한다. 대심문관은 광야에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거부하신 예수를 비판한다. 그는 인류에게 ‘빵’과 ‘기적’, 그리고 ‘권위’를 주어 그들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강변한다. 즉, 그는 교회가 세상의 힘을 장악하여 인류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섬김의 도를 통해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논리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 속에 이 대심문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국가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국가가 더 많은 힘을 갖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정의와 긍휼을 위해 사용하도록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교회가 먼저 힘의 우상을 파괴하고 섬김의 본을 보일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통해 참된 위대함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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