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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손가락,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손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10-1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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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영웅 헬무트 두카담의 비극은 우리에게 고통의 본질, 특히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한 고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생 최고의 순간, 가장 순수한 성취의 기쁨이 가장 잔혹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짓밟혔다. 왜 의로운 자가 고난을 받는가? 왜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신학적 난제다. 우리는 이 부조리 앞에서 설명을 요구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며, 종종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시선을 던진다.

성경은 이러한 고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심연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욥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그의 고통을 재단하려 했다. ‘네가 무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섣부른 정죄는 고통받는 영혼에게 가장 잔인한 2차 가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셨다. 대신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 당신의 주권적인 지혜와 광대하심을 드러내셨다. 인간의 유한한 이해력으로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 앞에, 욥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두카담의 부러진 손가락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욥의 경우처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지점에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초월적 답변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속에서 육신을 입었음을 선포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죄로 인해 겪으신 고통, 그것이야말로 부당한 고난의 정점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멀리서 관망하지 않으시고, 친히 고난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이 말씀은 고통이 사라지거나 그 아픔이 가벼워진다는 약속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비극과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주권적 선언이다. 두카담의 부러진 손가락의 아픔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바라볼 때 비로소 영원한 위로와 소망으로 승화된다. 교회는 세상의 고통 앞에서 섣부른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잠잠히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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