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라면’이라는 물음 앞에 무너지는 교회의 우상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7-13 07:10
본문
‘만약 피해자가 당신의 딸이었다면?’ 이 질문은 교회라는 거룩한 이름 뒤에 숨어 자행되는 모든 은폐와 침묵의 위선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망치와 같다. 교회 내 성적 학대 문제를 다룬 기고문이 던진 이 질문은, 개인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 한국 교회가 섬기는 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 근본적인 신학적 도전이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는 ‘신사 협정’과 ‘은폐의 해석학’이라는 기만적인 논리로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해왔다. 가해자의 회개보다 공동체의 안정을, 피해자의 치유보다 기관의 명예를 우선시하는 행태는, 긍휼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이는 은혜의 복음을 가장 추악하게 왜곡하는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 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로 내몰았을 때, 왕의 권위나 나라의 안위 때문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왕 앞에 나아가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치며 죄를 지적했다. 나단의 용기는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학대받는 자와 억울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평판을 관리하는 행정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죄악을 직시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나단과 같은 영적 지도자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7).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존재 이유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 없는 무결점의 상태가 아니라, 죄를 죄로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의로운 몸부림 속에서 드러난다. ‘내 딸이라면’이라는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명예라는 우상을 파괴하고, 가장 연약한 지체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할 때다.
오랜 시간 동안 교회는 ‘신사 협정’과 ‘은폐의 해석학’이라는 기만적인 논리로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해왔다. 가해자의 회개보다 공동체의 안정을, 피해자의 치유보다 기관의 명예를 우선시하는 행태는, 긍휼과 정의의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다. 이는 은혜의 복음을 가장 추악하게 왜곡하는 신성모독에 다름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 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사지로 내몰았을 때, 왕의 권위나 나라의 안위 때문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왕 앞에 나아가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치며 죄를 지적했다. 나단의 용기는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학대받는 자와 억울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평판을 관리하는 행정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죄악을 직시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나단과 같은 영적 지도자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7).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존재 이유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 없는 무결점의 상태가 아니라, 죄를 죄로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의로운 몸부림 속에서 드러난다. ‘내 딸이라면’이라는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명예라는 우상을 파괴하고, 가장 연약한 지체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교회의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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