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강요가 아닌, 탄식의 공명을 향하여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8-10 07:10
본문
최근 복음주의권 내에서 제기된 '사소한 불평으로 공동체의 기쁨을 해치지 말라'는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덕을 세우고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획일적인 긍정주의로 흐를 때,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성도들의 깊은 영적 고통을 외면하는 비극을 낳을 수 있다. 이는 마치 디트리히 본회퍼가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통렬하게 비판했던 '값싼 은혜(billige Gnade)'의 또 다른 모습, 즉 '값싼 기쁨'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본회퍼는 대가 없는 용서, 십자가 없는 제자도, 고난 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 지적하며, 이는 교회의 원수라고까지 단언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정당한 아픔과 탄식을 '사소한 불평'으로 치부하고, 공동체의 '좋은 분위기'를 위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고난의 신비를 거세한 '값싼 기쁨'에 불과하다. 욥의 친구들이 고난의 현실 앞에 선 욥에게 섣부른 신학적 정죄와 위로를 건넸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되었다. 진정한 공동체는 무조건적인 긍정과 찬양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고통의 신음 소리에 함께 귀 기울이며, 어두운 밤을 함께 통과하는 순례자들의 연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이 말씀은 기쁨과 슬픔이 분리될 수 없는 성도의 삶의 실존이며, 교회가 이 양자를 모두 끌어안는 '공명의 장'이 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성도들에게 맹목적인 긍정과 기쁨을 강요하는 것을 멈추고, 각자의 아픔과 탄식을 정직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고통의 골짜기를 함께 통과하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 즉 십자가를 통과한 '값비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길이다.
본회퍼는 대가 없는 용서, 십자가 없는 제자도, 고난 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 지적하며, 이는 교회의 원수라고까지 단언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정당한 아픔과 탄식을 '사소한 불평'으로 치부하고, 공동체의 '좋은 분위기'를 위해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고난의 신비를 거세한 '값싼 기쁨'에 불과하다. 욥의 친구들이 고난의 현실 앞에 선 욥에게 섣부른 신학적 정죄와 위로를 건넸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되었다. 진정한 공동체는 무조건적인 긍정과 찬양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고통의 신음 소리에 함께 귀 기울이며, 어두운 밤을 함께 통과하는 순례자들의 연대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이 말씀은 기쁨과 슬픔이 분리될 수 없는 성도의 삶의 실존이며, 교회가 이 양자를 모두 끌어안는 '공명의 장'이 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성도들에게 맹목적인 긍정과 기쁨을 강요하는 것을 멈추고, 각자의 아픔과 탄식을 정직하게 내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고통의 골짜기를 함께 통과하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 즉 십자가를 통과한 '값비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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