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그 너머의 상호의존을 향하여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7-07 07:10
본문
오늘의 지면은 세계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다채로운 변주로 가득 차 있다. 한편에서는 9개월 만에 자유를 찾은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의 안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250년 전 쟁취한 독립을 기념하며 ‘상호의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미국의 성찰이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캐나다 원주민 용사들을 기억하는 추모의 노래도 들려온다. 이 모든 소식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자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그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현대 서구 사회는 개인의 완전한 자율성을 자유의 최고 형태로 숭배하는 경향이 짙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 자아를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아 제기된 성찰처럼, 이러한 급진적 자율성의 추구는 종종 깊은 고립과 영적 중독이라는 쓰라린 열매를 맺는다. 의존에서 독립으로, 그리고 마침내 상호의존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의 여정이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교회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원리다.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은 “어떤 인간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라고 읊었다. 모든 인간은 거대한 대륙의 한 조각이며,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통찰이다. 한 줌의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대륙이 그만큼 작아지듯, 한 개인의 고통과 죽음은 공동체 전체의 상실이 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자유는 고립된 섬이 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사랑의 대륙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세우는 ‘상호의존’을 위한 자유다. 캐나다 원주민 용사들의 희생은 바로 이 상호의존적 자유의 숭고한 발현이었다. 그들은 자신과 무관해 보이는 땅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교회가 받은 자유의 목적을 명확히 선언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방종의 면허증이 아니며, 이기적 독립을 위한 선언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서로에게 기꺼이 매이는 ‘종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이다. 중국의 에즈라 진 목사가 쇠사슬에 매여서도 복음의 자유를 누렸다면, 자유의 땅에 사는 우리는 그 자유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개별 교회의 성장과 교인의 권리라는 좁은 의미의 자유를 넘어, 사회와 열방을 향한 거룩한 책임을 감당하는 상호의존의 공동체로 성숙해야 한다. 잊혀진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핍박받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의 빚진 자로 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참된 자유의 길이다.
현대 서구 사회는 개인의 완전한 자율성을 자유의 최고 형태로 숭배하는 경향이 짙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 자아를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미국 독립 250주년을 맞아 제기된 성찰처럼, 이러한 급진적 자율성의 추구는 종종 깊은 고립과 영적 중독이라는 쓰라린 열매를 맺는다. 의존에서 독립으로, 그리고 마침내 상호의존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의 여정이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교회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원리다.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은 “어떤 인간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라고 읊었다. 모든 인간은 거대한 대륙의 한 조각이며,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통찰이다. 한 줌의 흙이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대륙이 그만큼 작아지듯, 한 개인의 고통과 죽음은 공동체 전체의 상실이 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자유는 고립된 섬이 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사랑의 대륙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세우는 ‘상호의존’을 위한 자유다. 캐나다 원주민 용사들의 희생은 바로 이 상호의존적 자유의 숭고한 발현이었다. 그들은 자신과 무관해 보이는 땅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교회가 받은 자유의 목적을 명확히 선언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방종의 면허증이 아니며, 이기적 독립을 위한 선언문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서로에게 기꺼이 매이는 ‘종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이다. 중국의 에즈라 진 목사가 쇠사슬에 매여서도 복음의 자유를 누렸다면, 자유의 땅에 사는 우리는 그 자유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제 한국 교회는 개별 교회의 성장과 교인의 권리라는 좁은 의미의 자유를 넘어, 사회와 열방을 향한 거룩한 책임을 감당하는 상호의존의 공동체로 성숙해야 한다. 잊혀진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핍박받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사랑의 빚진 자로 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참된 자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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