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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인가, 바벨탑의 길인가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5-27 00:22

본문

미국 독립 2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한미 양국의 영적 유대를 확인하고, 복음의 빚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은 뜻깊은 일이다. 폐허 위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흘린 희생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서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감사와 회고에 젖어 있는 동안, 우리가 빚진 그 복음의 발원지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기독교 신앙이 특정 민족이나 정치 이념의 수호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경고다.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기독교 문명’이라는 이름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유혹이 서구 사회를 흔들고 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카이사르의 군병으로 만들려는 위험한 시도다.

역사는 우리에게 준엄한 교훈을 남겼다. 1934년 독일, 히틀러의 국가주의 광풍이 교회를 집어삼키려 할 때, 고백교회 신학자들은 바르멘에 모여 신학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제1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듣고, 삶과 죽음 속에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선언하며, 국가나 민족, 특정 지도자를 우상으로 섬기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했다. 교회가 세상의 다른 어떤 권세에도 종속될 수 없음을 목숨을 걸고 천명한 것이다. 이 바르멘 선언의 영적 투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한국교회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과거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순수한 복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힘을 빌려 교회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민족주의와 이념의 갑옷을 입고 바벨탑을 쌓는 길로 갈 것인가? 교회의 힘은 세상의 권력이나 숫자에 있지 않다.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기 비움에 있다.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사명을 받았지, 세상의 왕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립보서 3:20). 한국교회는 지상의 이념과 권력 다툼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늘의 시민으로서 거룩성과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만이 복음의 빚을 진 자로서의 합당한 응답이며, 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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