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총회-정규오 목사 공적 조사(2)
본문
? 공적개요
1. 장로회 내 자유주의 신학을 퇴치하는 운동에 앞장섬. 2. WCC 가입 반대 운동의 주역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함. 3. 「표준 새 번역 성경」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른 성경」 번역을 주도하고 보급하는데 앞장섬. 4. 정부의 단군 신전 건립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여 저지함. 5. 정부의 만 원권 불상 화폐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저지함. 6. 군목제도를 정부의 허락으로 추진되는데 주역을 담당함. 7. 합동총회의 십일조 상납제도의 정착으로 재정난을 해결함. 8.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와의 재합동에 중심적 역할을 감당함. 9. 장로회신학교(총신대학교 전신) 설립에 공헌함. 10. 광신대학교 설립하여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기독교 인재를 양성함. 11. 구역공과 공부 책을 최초로 발행하여 보급함.
? 공적상세
“바른 신앙, 넓은 시야의 지도자,” “아름다운 원칙주의자”로 표현되는 해원 정규오(丁奎五, 1914. 11. 14∼2006. 1. 19) 목사는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에서 부친 정효순과 모친 강누동의 5남으로 출생하였다. 1921년 형님의 인도로 방산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929년 남대리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45년 조선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1946년 51인을 규합하여 신앙동지회를 주도하였던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투쟁을 하였다. 그는 교회 정치와 행정의 방향을 선정하였고, 교육 분야에 헌신했으며, 바른 신앙을 한국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해원의 업적은 크게 3가지 분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신학과 신앙 분야, 교회 정치 및 행정 분야, 그리고 교육 분야이다. 우선 해원의 ‘신학과 신앙 분야’의 업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는데, 가장 먼저 “51인 신앙동지회 결성과” “자유주의 신학 퇴치 운동”을 들 수 있다, 해원은 1945년 9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면서 자진 폐교하자 채필근의 제안으로 설립되었고,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이 교수로 임용되어 있었다. 해원은 김재준이 성경유오설을 가르치자 51인이 동참하는 신앙동지회(51인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여 자유신학과 투쟁하였다. 당시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로 인준받은 조선신학교가 자유주의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정규오는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51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제33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1947년 4월 18~22일)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소집될 때 진정서(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총회는 51인 학생들의 진정서가 이유 있다고 보고 조사위원을 내서 총회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둘째,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반대와 NAE 결성이다. 해원은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교단 분열을 각오하면서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1953년 7월 한국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결성한 그는 박형룡과 함께 WCC에 대항하였다. 신앙동지회는 NAE의 신앙이 자신들과 동일함이 확인되자 한국 NAE를 해원 등 신앙동지회 및 장로회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미국 NAE가 본래의 신앙에서 이탈하자 NAE와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그는 박형룡 박사와 함께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정통보수신학을 사수하였던 것이다. 셋째는 『바른 성경』 번역 보급 운동이다. 해원은 대한성서공회에 의해서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표준 새 번역 성경』이 발행되었을 때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전국을 다니면서 『표준 새 번역 성경』 비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해원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한국성경공회를 창립하고 광신대학교를 주축으로 하여 새롭게 번역한 『바른 성경』을 출판하여 개혁주의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이 밖에도 그는 단군 신전 건립 반대 운동 주동하였고, 만 원권 지폐에 석가여래좌상이 삽입된 만 원권 화폐를 발행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광주지역에서 중단시키는 운동을 맨 앞에서 이끌었다. 결국 정부 당국은 만 원권 도안의 재검토를 지시하여 폐안하기에 이르렀고, 불상 대신 세종대왕상을 삽입하였다. 교회 정치 및 행정 분야에서 해원의 사역을 살펴보면, 가장 주목할 것이 ‘합동총회와 개혁총회의 재합동’에 있어서 중심역활을 한 일이다. 해원은 개혁총회가 합동총회로부터 분리하여 나온 26년 후 합동총회와 재합동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이것이 해원의 생전에 한국교회와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되는 마지막 공헌이다. 합동측과 개혁 측과의 합동은 신학적 입장 차이가 분명한 교단과의 합동은 불가능하겠지만 같은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공유하는 보수 교단들은 각자의 교권과 지역주의를 탈피하면 대연합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적인 큰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또한 해원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군목제도가 나오기까지 장로회 총회 군목제도 추진위원회 서기로 일하면서 군목제도가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계속해서 해원은 1559년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면서 대부분의 교단 재산이 통합측에 속하게 되자 십일조 상납제도를 찬성하고 추진함으로 본 교단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 힘차게 복음 사역을 펼치는 데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육 분야에서 해원의 사역을 살펴보면, 첫째는, 장로회신학교 설립에 공헌한 것이다. 박형룡을 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하는데 주축이 된 인물들은 학우회장 해원을 중심으로 하는 학우들과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그(정규오)와 그의 동지들이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투쟁하며 활동한 결과로 남한에서 잠자고 있던 교계의 보수 세력이 각성하고 일어나, 1948년 6월 3일 서울 남산에서 9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언급하였다. 해원은 개혁주의 성경관 수호를 중심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투쟁하였고, 신학적으로 좌경화된 조선신학교를 버리고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는데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 둘째는 광신대학교 설립하여 지역 특성에 맞는 인재를 양성한 것이다. 해원은 “광주신학교설립의 의의와 그 전망”에서 광신대학교를 설립하는 이유 3가지를 밝혔는데, 이단 사설의 횡행, 교직자의 자질 향상, 지방교회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중 “이단 사설의 횡행”에서 해원은 신학교 설립 목적의 핵심을 개혁주의 신학 수호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자유주의, 신신학, 위기신학, 신비주의, 여호와의 증인, 신령통일협회, 안식교, 박태선파, 천주교 등 이단 사설들이 도약(跳躍)하여 성경을 파괴하고 …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주의자들은 신학과 신앙은 불문에 부친다고 하면서 단일교회를 지향하다가 이제는 단일교회 운동의 선을 넘어서 모든 종교는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 용공정책까지 쓰고 있으니 … 이런 때에 진리를 보수하는 진정한 복음적인 교회들은 진리의 봉화를 높이 들고 나아갈 노선을 밝혀주고 지팡이를 들어 가나안 복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만란을 무릅쓰고 설립한 광신(光神)의 첫째 이유이다.” 해원의 강조대로 광신대학교의 설립 취지와 목적은 “칼빈주의 신학의 보수와 선포”, “성령 충만으로 세계 복음화”, “경건한 신앙의 생활화”라는 3대 교훈에 잘 새겨져 있다. 또한 해원은 한국교회에 사용하고 있는 구역 공과책의 원조라 볼 수 있다. 구역공과 책은 합동총회 호남대회에서 처음 발간하였는데, 그 발원지가 해원이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시절의 광주중앙교회였기 때문이다. 해원은 아내 문인순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고, 2006년 1월 19일, 92세의 인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오직 개혁주의 신학을 지켜내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복음적인 건전한 한국교회를 유지하고 건설하고자 정치를 했고, 교육을 했으며, 성경을 번역하였고, 사회참여 운동에 앞장섰다. 김남식 박사는 해원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교정가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원칙 위에 바로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교회를 바른 신학위에 새우려는 열망의 산물이었다. 그의 마지막 사역이 나뉘어진 교회를 하나되게 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요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운 지도자’로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영원의 세계로 옮겨 갔다.
? 근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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