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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한국교회 - 기독교 민족주의
김영한 박사(샬롬나비 상임대표, 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명예교수)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4-04-01 20:36

본문

유대교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남은자들의 애국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모세와 에스더, 느헤미아, 다니엘 세 청년 등이 대표였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경적 신앙은 각 나라에 있어서 그 민족에게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응집력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 기독교 애국지사들(이승만,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이동녕, 김구 등)이 3.1정신의 계승으로 상해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헌장(기독교 나라, 자유민주공화국)에서 세워진 것이다.  


I.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과 이승만

1.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이 3·1운동 20년 전 쓴 『독립정신』(1899)

 이승만은 1899년 투옥 직후 영문 및 한문으로 된 성경을 정독하면서 동료 정치범들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였다. 또 감옥을 가끔 심방하는 아펜젤러,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게일 등 북미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받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잇따라 들어오는 감옥동료 개화파 청년들에게 전도하여 무려 40여 명이나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다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한성감옥에서 복역 중 옥중저서 『독립정신』(1899)을 썼다. 그가 꿈꾼 나라는 자유 민주국가의 건설이었다. 3·1운동은 『독립정신』에 명기된 개인의 자유와 평화의 ’기독교국가 정신‘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정치제도에 달렸다”고 보았다. 


II.  3.1운동과 이승훈, 신석구, 길선주, 김마리아

1. 이승만과 안창호 등 기독교인 인사가 중심된 ‘대한인 국민회’

 1900년 초 미주에 있는 교포들은 조국이 미국처럼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이 망하자 1910년 9월 더 이상 대한제국을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미주 대한인 국민회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창립하였고 임원들은 주로 기독교인이었다.


2.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의 주도로 기독교계 연합

 국내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세계정세를 인식하고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세력은 평안도 이승훈 중심의 장로교계라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이승훈, 양전백, 함석헌 등 구(舊)신민회 세력이었다. 장로교계는 1918년 9월 선천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중국 상해(上海)에서 온 여운형과 미국 선교사 조지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1979)의 세계정세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서울에서는 감리교가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고 YMCA 간사 박희도 전도사가 연락을 주도했고 서울 수창동 박희도 사무실에서 이승훈과 박희도, 정춘수 등이 회합함으로 기독교 연합전선이 구축되었다.


3. 이승훈 장로 주도로 천도교와의 합작 

서울에서는 천도교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독립운동 거사를 기독교 등의 종교계와 사회명망가 등을 망라한 민족대연합의 운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3·1독립선언서 작성에 있어서 서명자 순서로 갈등을 빚을 때 남강 이승훈은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건 죽는 순서인데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며 양보.


4. 신석구 목사, 길선주 목사, 유관순, 김마리아의 기독교 애국주의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독립시위에 참가하는 것” 곧 “애국”이라고 믿었다. 신석구 목사는 수천년 역사의 조국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 천의(天意)라고 했다. 2월 27일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4천년 전하여 나려오던 영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라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III.   임시정부의 헌장, 기독교 정신,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1. 3·1운동 직후 세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상해는 임시정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 중 많은 인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상해선인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였고, 동시에 상해 임시정부를 창립하였다. 1919년 4월 10일 밤  먼저 설립한 것은 임시의정원이었다. 회의는 의장으로 선출된 이동녕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國號)였다.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가진 국가가 탄생되었다. 10조로 된 임시헌장(1919년 4월 11일)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이다. 일종의 의원 내각제 형태였다. 임시의정원은 이 관제에 따라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리고 행정부서 책임자인 국무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통과시켰다.  회의를 마친 것은 1919년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2.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해에서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건립은 한국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수립 당시 제정·공포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면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군주 주권과 전제(專制) 군주제의 역사가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1) 안창호의 임시정부 통합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 임시정부는 곧 바로 통합되었고, 상해임시정부와 노령임시정부가 통합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작업에 내무총장 안창호가 중요한 역할.

2) 임시 헌장 채택: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

제1장 총강에서 대한민국의 성격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고 선언


3. 황제국 아닌 민주공화국 수립

일부 계층이 권력을 쥐는 ‘귀족공화국’이나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못박은 것이다. "세계 최초로 헌법에 '민주공화정'을 명기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4.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기독교의 역할

1) 미국 기독교인 교포들의 역할

당시 미국 교포들은 ‘각 나라는 스스로의 나라를 개척할 자주의지가 있음’을 천명한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시류에 편승해 ‘대한인국민회 창설’에 가담했다. 미국 교포들은 헌금을 모아 이 모임을 창설했으며 1918년 12월 13일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민족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을 임명했다.

1919년 4월 11일 만들어진 나라의 국무총리(당시에는 최고 지도자)는 바로 이승만이었다. 이들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며, “임시정부는 결국 기독교가 주도하는 정부였다. 이들 기독교인 배후에는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했던 상해에서 활동했던 YMCA선교사들이 있었다.


2) 상해 한인교회: 임시정부 만드는 데 중심 역할

1915년 창설된  상해 한인교회에서 신한혁명당이 분파됐고, 이는 상해 임정 창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신한청년당 멤버 중 여운형(공산주의자가 되기 직전,  상해 한인 교회 전도사로 섬겼던 사역자), 선우혁, 장덕수, 조동호 등은 모두 기독교인으로, 후에 한국에서 현순(玄楯) 목사가 파송돼 임시정부 창립을 선도했다.


3)  임시정부 헌법 전문: ‘神人一致(신인일치)’를 명시

당시 상해 임시정부 헌법은 전문과 10개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기독교 정신에 의거했다. 헌법 전문은 ‘神人一致(신인일치)’를 명시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대한민국이 일치됐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임시정부 헌장 7조에 “大韓民國은 神의 意思에 依하야 建國한 精神을 世界에 發揮하며 進하야 人類의 文化及 平和에 貢獻하기 爲하야 國際聯盟에 加入함.”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라는 뜻이다.


4)  선서문(宣誓文)의 첫 문장: 계급을 부정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선언

임시헌장에 붙여서 발표한 선서문의 첫 문장은 계급을 부정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민국(民國) 원년(元年) 3월 1일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함으로브터 남(男)과 여(女)와 노(老)와 소(小)와 모든 계급(階級)과 모든 종파(宗派)를 물론(勿論)하고 일치(一致)코 단결(團結)”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은 대한민국의 기초란 모든 계급과 종교를 초월하고 있으며 봉건게급과 노동계급을 부정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의 유(流)하난 일적(一適)의 혈(血)이 자손만대(子孫萬代)의 자유와 복(福)영(榮)의 가(價)이요 신(神)의 국(國)의 건설(建設)의 귀한 기초(基礎)이니라.” 마지막 문장은  대한민국의 건설이 하나님 나라 건설과 연결되어 있음을 천명.


5. 공산세력의 상해 임시정부 헤게머니 쟁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로 통합되면서 ‘노령정부’의 공산세력이 상해에서 헤게머니 쟁탈에 돌입한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로 기울기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어려웠던 임정 상황을 회고한다. "임시정부 세운 지 3, 4년이 지나면서 열렬했던 독립운동자들이 하나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했다. 한때 천 여 명에 이르던 독립운동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수 십 명에 불과하니, 최고기관인 임시정부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해에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산주의자인 통합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정무회의에서 "나는 그 대통령(이승만) 밑에서 일 안 하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했다.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김구는 "대표회의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는 '내무부령 1호'를 공포했다.


1) 이동휘의 반란과 이념적 혼란

김구는 임정(臨政)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백범일지'에 이동휘의 공산당 반란과 김구의 진압 기록: 이동휘가 김구에게  말했다: "적은이(아우)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김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능하오." "우리 독립운동이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을 하심이 옳지 못하니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나와 헤어졌다." 

1923년 이승만이 발표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 논문은, 마르크스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폭력혁명선언에 정면 대항하는 세계최초의 ‘반공선언’


2) 임시정부 지킴: 한국국민당 창당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소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소(解消)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11월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이승만이 미국 중심 독립 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킨 공로는 막대하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김구는 마지막 주석이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공통점은 다음 4가지다. 애국심, 반일(反日), 반(反)공산주의, 기독교 사상

맺음말: 영원한 가치를 위해 일시적 가치를 희생하는 인물이 필요

① 오늘날 에스더 같은 죽음을 불사하는 여성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만 간계 에 의해 유데인들이 멸절하는데 나만 궁에서 편히 살 수 없다. 3일간 금식기도한 후 “죽으면 죽으리다.”는 결단하고 왕께 나아가 민족 구함.

② 모세와 바울처럼 자신을 희생하려는 기독교 애국자가 필요하다.

모세도 배역한 민족을 위하여 자기를 벌하고 민족을 살려달라고 기도: “...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바울도 믿지 않는 민족을 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버림을 당할 기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③ 다니엘처럼 사자굴에도 들어가는 기독교 애국자가 필요하다.

하루 세 번씩 이스라엘이 있는 동쪽 문을 열고 하나님께 중보기도: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죄와 벌』을 쓴 러시아 기독교문호 도스도예브스키의 글에 다음같다: “단지 살아 있기만 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재는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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