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교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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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오는 28일과 29일 제13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은 언더우드의 선교 열정과 헌신을 기념하여 매년 개최되는 학술행사로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를 배출한 미국 뉴브런스윅 신학교가 주관한다.
심포지엄은 코로나 19로 지난 2년간 중단됐으나 올해 13번째 심포지엄을 열게 됐다.
올해 주 강사는 세계적인 기독교 역사학자 존 코클리 뉴브런스윅 신학교 석좌교수다.
첫 번째 강연은 기독교의 “메타역사(metahistory)”, 즉 오랜 시간에 걸쳐 전개된 기독교 운동의 포괄적인 서사를 개념화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최근까지 유럽과 북미 역사가들은 은연중에 기독교 운동이 지중해 유역에서 시작하여 이후 서유럽과 북미로 이동했다는 메타서사(metanarrative)의 틀 속에서 연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다른 움직임에 대한 표현들을 주요 메타서사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20세기 말까지 그런 접근에 대한 비판들, 즉 기독교 역사 전반을 아우르는 어떤 서사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면, 데일 어빈(Dale Irvin)이라는 학자는 기독교 역사가 단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다수의 전혀 다른 서사들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며 실제로 기독교들의 역사들(the histories of Christianities)이라는 표현을 썼다. 첫 번째 강연의 나머지 부분은 라민 사네(Lamin Sanneh)와 앤드류 월스(Andrew Walls)의 저작을 탐구한다. 이 두 학자는 메타서사의 어느 한 흐름이 다른 역사적 흐름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면서 메타서사를 회복하기 위한 토대를 놓았다.
이들 저작의 핵심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로마 문화 속으로 퍼져나가며 시작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번역된(translated) 종교라는 통찰이다. 이슬람과 달리 기독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듣는 이들의 표현 방식으로 전달하여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월스의 단서들에 따르면, 이러한 원리는 문화와 결부된 하나의 전통을 다른 문화권 전통들의 규범으로 만들 때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독교사의 메타서사를 형성하는 데에 다음 세 가지 방식이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기독교 역사를 기독교 메시지 그 자체와 연결한다. 성육신 교리에서 기독교 메시지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번역되신 결과 하나님께서 특정한 문화권 안으로 들어오신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 기독교 역사의 “연쇄적” 본성을 강조하여 설명을 돕는다. 이 본성에 따르면, 기독교는 문화적 번역이라는 계속되는 과제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결과에 따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전형적으로 발흥하고 쇠퇴한다. 그리고 셋째, 기독교의 모든 주어진 형태 안에 있는 긴장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 긴장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문화의 만남 사이에서 생기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정체성 안에 존재하는 보편화의 특성으로 인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동질화를 목적으로 역사를 “입양된 과거”로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긴장이다.
두 번째 강연은 중세 서구 기독교 인물들의 전기(傳記)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두 개의 주제를 논한다. 기독교 전기와 비평적 인격의 관계를 형성하여 과거와 만나는 하나의 연습처럼 이 주제들을 교육학적으로 구성한다.
이 두 번째 강연은 첫 번째 강연에서보다 더 일반적으로 다룬 내용, 즉 기독교 신앙을 문화적 용어들로 번역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중세의 예로 설명한다. 첫째 주제는 “항상성과 회심(constancy and conversion)”이다. 우선 주후(A.D.) 400년경 쓰인 아주 금욕적이지만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한 투르의 마르티누스(Martin of Tours) 감독에 관한 전기로 시작한다.
이 전기는 성경의 많은 이야기와는 대조적이지만 이 영웅의 덕을 “항상적”, 즉 불변적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리스-로마의 전기 전통들과 함께 연속성의 관점을 갖는다. 그러나 한편 새로운 초월적 관점을 포함하는 서사구조를 채택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영웅의 삶 전체에 함께 하심을 묘사하면서 그리스-로마의 전기 전통들과는 불연속성의 관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다음으로, 동일하게 유명한 기록으로 중세 말 즈음인 1228년에 쓰인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에 관한 전기가 있다.
이 전기는 성 마르티누스 유형의 인물로 프란체스코의 사회활동과 금욕주의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야기 안에는 그리스도가 함께하심을 유지하지만, 반면 프란체스코를 동시에 회개하는 죄인으로 묘사한다. 이런 그리스-로마의 이상인 항상성(constancy)을 버리고 개인의 내적인 삶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문예부흥)를 예측한 후기-중세 문화 경향들과 일치한다. 둘째 주제는 “성별(性別)과 권위(gender and authority)”이다. 여기에서 쟁점은 ‘전기에서 여성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이다.
또다시, 초기 기독교 전기가 그 이전 그리스-로마의 문학적 관습을 이용하고 있는 예이다. 이런 경우는 2세기에 나온 사도 바울의 여제자로 추정되는 허구적 인물인 테클라(Thecla)에 관련된 “행전(Acts)”이 있고, 더욱 모호한 서술 방식이긴 하지만 3세기에 나온 카르타고의 페르페투아(Perpetua of Carthage)의 순교 이야기가 있다. 전기작가들은 이 여성들의 덕, 힘, 권위가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방식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해석하여, 완전한 여성은 실제로 남성이 되는 과정이라고 상상한 플라톤, 그리고 다른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여성에 대한 관념에 근거한다.
그리고 중세 말의 한 예로는 13세기에 쓰인 오위니즈의 마리(Mary of Oignies)에 관한 전기가 있는데, 이 전기에서는 그런 그리스-로마적 관념을 버리고 있다. 이 전기에서 여성의 유덕한 행동은 특징적으로 여성적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당대의 몇몇 문화적 발전 상황을 반영하고 보완하는데, 소위 그레고리오 개혁 운동(Gregorian Reform movement)이라 부르는 남성 획일적 교권의 권위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개인 내면의 삶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다. 후자는 곧 르네상스 시대에 결실을 맺게 된다.
두 번째 강연의 결론에서는 이 주제들이 우리 자신의 삶과 상황에도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동시에,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볼때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는 점을 암시한다. 따라서 과거 기독교와 우리의 만남이 갖는 의미는 과거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두 관점이 계속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
세 번째 강연은 미국 목회자이며 신학자인 존 헨리 리빙스턴(John Henry Livingston)을 대표적 인물로 삼아 근대 기독교 세계선교운동의 몇몇 뿌리를 검토한다. 네덜란드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리빙스턴은 뉴욕시 네덜란드 개혁교회(the Dutch Reformed Church)의 목회자였고, 1796년에는 뉴욕선교회(the New-York Missionary Society) 창립자 중 하나이다. 선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소위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 형성되고, 중도적인 기독교적 성격으로 이성적으로 볼 때 모순이 없고 미국독립혁명에서 표출된 자유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신앙을 강조한다. 이러한 사상들은 결국 서구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두고, 중세시대 독특한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사상을 선호한다. 더불어 문화적 변천의 시기인 근대 초기에 대전환을 겪으면서, 특별히 “번역된” 기독교 형태에 뿌리를 두게 된다.
세 번째 강연의 결론 역시 우리가 역사적 기독교와 만나는 이중적 방식에 관하여 말한다. 즉, 어떻게 우리 자신이 역사적 기독교를 맞이하고 동시에 역사적 기독교와 얼마나 거리를 두는지를 언급한다. 이 경우, “입양된 역사(adoptive history)”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월스의 관념에서 보면, 우리는 비로소 교회의 중심적인 역할이 각자의 소명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충실하게 소명을 따른 이들을 존경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소명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화를 근거로 한 가정들을 우리가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