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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년 후 한국교회에 던지는 질문

김형석 기자 기자
작성일 2026-07-11 09:00

본문

도서 표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당시의 개혁 정신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되돌아보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R.C. Sproul이 저술하고 Ligonier Ministries에서 출간한 『The History of the Reformation』(출간일 미상)는 종교개혁의 역사적 흐름과 그 신학적 핵심을 조명하며, 현대 교회가 직면한 도전 과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은 16세기 유럽을 뒤흔들었던 종교개혁의 격동기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 회의 직후 마르틴 루터를 “이단의 구렁텅이”라고 칭했으며, 교황 레오 10세 역시 루터를 “그리스도의 포도원에 풀려난 들돼지”이자 “완고하고 악명 높으며 저주받은 이단자”로 규정했다. 이러한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루터는 1521년 5월 4일, 친구들에 의해 비밀리에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옮겨져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종교개혁은 크게 두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소위 ‘실질적 원인’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형식적 원인’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권위를 지닌다는 원리였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 전통을 존중하기는 했으나, 이를 계시의 규범적인 원천으로 삼지는 않았다. 따라서 개신교(Protestant)의 ‘항의’는 단순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문제를 넘어, 특히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수많은 교리에 대한 도전으로 확장되었다.

종교개혁의 물결은 독일을 넘어 빠르게 확산되었다. 각국에서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의 위그노,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스위스, 헝가리, 네덜란드 등지로 개혁의 불길이 번져나갔다. 울리히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에서, 장 칼뱅이 프랑스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장 칼뱅은 1534년, 교회가 신약성경의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그의 연설문은 불태워졌고 칼뱅은 제네바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며 국제적인 종교개혁 확산의 주도적인 신학을 정립했다. 『기독교 강요』 초판이 완성된 1536년, 칼뱅은 기욤 파렐의 설득으로 제네바를 종교개혁의 모델 도시로 건설하는 데 동참했다. 비록 1538년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에서 3년간 사역하다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복귀했지만, 그의 신학은 종교개혁의 국제적 확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뱅 신학의 핵심은 만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이었으며, 그의 가장 큰 열정은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는 예배의 순결 개혁이었다. 제네바는 유럽 전역에서 지도자들이 모여 칼뱅의 가르침을 받고 종교개혁 모델을 배우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하며 종교개혁의 파장이 일었다. 1534년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피의 메리’ 여왕 치하에서 더욱 격화되어 많은 이들이 제네바로 피난하게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박해가 중단되었으나, 그녀의 입장은 1570년 교황의 파문 교서를 촉발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의 지도 아래 종교개혁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다. 1561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Kirk)가 재조직되었다.

17세기 초, 종교개혁은 순례자들과 청교도들의 도착과 함께 신대륙으로 전파되었으며, 그들은 개혁주의 신학과 제네바 성경을 함께 가져왔다. 종교개혁 신학은 수십 년간 개신교 복음주의를 지배했으나, 이후 경건주의와 피니주의의 영향으로 희석되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서구 세계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급격히 쇠퇴했으며,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의 도전을 받았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계에서 종교개혁 신학은 소수 의견으로 밀려났으며, 번영신학과 신오순복음주의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신학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번영신학의 미국 내 확산은 흥미로운 교회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다. 영국 플리머스 형제단에서 뿌리를 둔 번영신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성경 학교 운동, 예언 집회, D.L. 무디와 같은 설교자들에 의해 번영신학은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스코필드 참조 성경의 출판은 미국식 번영신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스코필드 성경은 연구 노트와 함께 번영신학 확산의 대중적인 도구 역할을 했다. 이 신학은 주로 종교개혁 사상에 뿌리를 둔 인물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고전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주제들은 이 운동에 의해 상당히 수정되었다. (현재 ‘The Reformation Study Bible’로 알려진 New Geneva Study Bible은 최초의 독특한 개혁주의적 연구 성경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The History of the Reformation』은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인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세속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혼합주의적 신앙 경향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통 신학계 전문가들은 “종교개혁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 역시 새로운 이단의 구렁텅이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성경적 진리의 철저한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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