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탄소중립, 이경호의 '데드라인 1.5'
글/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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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호 & 이창희 (UStudio), Deadline 1.5, 2021, 싱글채널 비디오
미술관에 방문할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는 아마도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하고(데이터 1MB 사용에 따라 11g의 이산화탄소 배출), 샤워와 양치를 한 후(물 1L 사용에 따라 0.332g의 온실가스 배출),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다음(1200W 헤어 드라이기 5분 간 사용 시 43g의 탄소 배출) 옷을 입고(하루 동안 입은 옷은 대략 76kg의 탄소를 배출), 자신의 차량 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미술관으로 이동할 것이다(1km 이동할 때마다 승용차는 210g, 버스는 27g, 지하철은 1.5g의 탄소 배출). 그러고 나서 엄미술관에 방문하여 기후위기를 다룬 전시를 보고, 환경을 보호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저녁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중 하나를 먹을지도 모른다(소고기 1kg을 생산할 때 59.6kg, 돼지고기 1kg을 생산할 때 7.2kg, 닭고기 6.1kg의 이상화탄소 배출). 이렇게 한 사람이 하루에 남기는 탄소의 양은 3만 3천900g 정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온습도 조절 등을 위해 전력이 상시적으로 소비되며, 조명 점등, 가벽 제작 및 철거, 작품 운송, 전시 인쇄물 제작을 위한 용지와 잉크 사용, 그 외 업무 과정 등에서 적지 않은 탄소가 발생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이 현재의 기후위기 상황에서는 더 바람직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 글도 짧고 함축적인 한 문장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아무래도 탄소를 덜 배출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면한 기후위기 시대에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관습적인 전시 형식 이외에 전시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만한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것이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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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미술관은 생태 미술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경호 작가 개인전 ‘데드라인 1.5’를 10월 29일까지 열고 있다.
엄미술관에서 이경호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은 만연한 개발과 성장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 의미망에 개입하고 변형을 가하기 위해서다. 현재의 생태적 위기 상황은 특정 개인, 지역, 국가의 탄소 저감 노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성 내 모든 존재들이 연대하여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배치 전반을 조정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질학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의 영향력을 줄이면서 다른 존재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시점에 미술관은 관객들이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매개로 정동적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엄미술관은 전시 연계 포럼을 개최함으로써 기후 변화의 현황과 최신 연구 성과들을 살피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이에 대한 대응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그린 뉴딜, 탈성장 담론 등 서로 교차하는 관점들을 살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번 이경호의 개인전은 예술가의 본질적 정체성이나 예술 작품의 조형성 그 자체를 부각하기보다는 전시와 관객 사이의 상호관계와 의미의 창발 과정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자 했다. 관객들이 엄미술관 2층으로 올라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거센 바람소리와 파란 천의 일렁거림이다. 푸른 천은 지구 온난화로 인해 상승하는 해수면에 대한 은유로서, 전시된 작품들의 감상을 방해한다. 관객들은 저마다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신체를 통해 그러한 상황 속에 개입하고 반응한다.
이는 기후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위험들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이 같은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대응 과정에도 다소간의 불편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런데 기존에 편의성을 증대한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인간 삶을 억압하는 요소로서 작동하는 현 시점에서, 개개의 행위 주체들이 기꺼이 불편을 감내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는 오히려 해방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넘실대는 파도 너머에는 인공지능이 제작한 회화 작품들이 전시 되어 있다. 인공지능을 이용한 작품 제작 과정은 수집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사회 내 정보들의 지형을 반영한다. 보쉬의 회화 스타일을 반영한 이 지옥의 풍경은 흡사 전쟁 피난 행렬 같다. 전례 없는 홍수로 인해 처절하게, 그러나 기력을 소진한 채로 유령처럼 공간을 떠도는 인간 군상은 이미 발생중인 기후 난민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기후 위기가 심화되어 갈수록 인구의 배치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 이번 전시는 물질이 가진 역능과 이로 인한 세계 질서의 재배치 과정 또한 드러내 보인다. 이경호 작가의 <총, 균, 쇠 & 비, 비, 비>(2022)는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1997)를 통해 제기했던 논의를 기반으로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역사가 왜 대륙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인류의 역사가 농경사회에서 근대 문명으로 전환될 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들이 지리적 영향관계 속에서 총, 균, 쇠 등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보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경호는 앞으로는 기후 변화로 인해 비가 총, 균, 쇠와 같이 인류 역사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물질이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인류 역사에서 근대적 전환을 가져온 또 다른 중요한 기점은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이다.
이경호 작가가 <Moneyfall>(1989), <Monopoly>(1989), <Circulation>(2010), <Jackpot!>(2014), <Meaningless... Meaningless... Meaningless>(2014) 등 화폐와 자본에 대한 일련의 작업들을 다루었던 이유도 이러한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류에 의한 지구 환경의 극적인 변화를 구분하기 위해 도입된 지질학적 개념인 ‘인류세’를, 다른 일군의 학자들은 ‘자본세(capitolocene)’로 지칭할 것을 주장하는 이유도 자본주의로 인한 개발의 가속화로 인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회 내 하부구조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는 기후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편, 엄미술관 1층 초입에 전시된 이경호의 <어딘가에(Somewhere)>(2006~) 연작은 관객이 부유하는 비닐봉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실제로 비닐봉지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한낱 얇고 가벼운 사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물질이다.
먼저, 비닐봉지를 삼킨 동물들의 개체수가 감소하면서 먹이사슬이 교란될 수 있다. 또, 플라스틱은 화학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물리적으로 분해되며 그 과정에서 미세 플라스틱의 형태로 여러 동물에 의해 섭취된다.
<봉다리 북극곰>(2022)은 단순히 북극곰의 형상을 띤 비닐봉지의 모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봉다리를 비롯한 각종 플라스틱이 곰의 내장처럼 몸속에 자리 잡은 채 내분비계를 교란하고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각종 플라스틱을 먹은 동물을 먹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미세 플라스틱을 체내에 축적한다.
2019년 세계자연기금(WWF)에 따르면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섭취하는 미세 플라스틱의 양은 평균적으로 신용카드 한 장 분량 정도라고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바다에 어류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제기되는 2050년 경에는 인간을 비롯한 지구 속 생명체들이 섭취할 플라스틱의 양 또한 더 늘어날 것이다.
쉬이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현재의 문제 상황을 마주하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초월적 존재가 나타나 인류를 구원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그렇다고 지독한 비관에 빠질 경우 일말의 대안을 고안하고 실천할 동력을 찾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이에 엄미술관은 이경호의 개인전을 통해 지구라는 이 행성을 공유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자들과 공생하기 위해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착취적 권력관계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촉구하고자 한다. 어쩌면 거창한 포부에 그칠지 모르겠으나, 이번 전시의 목표는 여러 물질들의 역능을 인지하고 우리가 이들과 연결된 채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관계적 감각을 되찾는 것에 있다.
탄소중립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인간을 인식의 주체로서 설정하며 타자를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재론적인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미생물, 바이러스, 전기 등을 포함하는 각종 물질들, 비인간행위자들과 관계의 지형을 그리고 이들과의 윤리적 연대를 꿈꾸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