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을 넘어선 용기, 장기기증자 유가족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뇌사 장기기증인 유가족 장기기증 홍보 캠페인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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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7.9명씩 사망하는 장기이식 대기 환자들에 희망 전하고자 40명의 유가족 나서
이정숙(82세, 여) 씨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외아들 정희섭 씨(기증 당시 47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따뜻하고 나누기를 좋아했던 그는 목사를 꿈꿨다. 그러나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홀어머니를 부양하고자 치과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등록금과 생활비를 스스로 벌며 학업을 이어갔다. 졸업 후 대학 선배의 병원에서 일했던 정 씨는 2017년 자신의 병원 개원을 앞두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금요일 저녁, 정 씨는 갑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고통을 호소했다. 마침 교회에 가려고 준비 중이던 어머니 이 씨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발견하고 급히 병원을 찾았지만, 뇌출혈이 발생한 정 씨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뇌사 판정을 받았다. 평소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던 아들을 떠올린 어머니 이 씨는 고심 끝에 장기기증을 결심했고, 2017년 6월 15일 정희섭 씨는 5명의 생명을 살리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후 5년간 거동이 어려울 만큼 큰 상실감 속에서 지냈던 이 씨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또 하나의 큰 상처였다. “아들 장기기증하고 돈 많이 받았겠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씨는 마치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고통을 느꼈다고 말했다.
장기기증 편견 맞서는 뇌사 장기기증 유가족들의 용기
(재)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이하 본부)는 지난 10월 30일,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 둘레길 일대에서 이정숙 씨와 같이 뇌사 장기기증을 통해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 40여 명이 장기기증 인식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다고 밝혔다.
본부가 2022년 실시한 뇌사 장기기증인 유가족(이하 도너패밀리)들의 심층 인터뷰에 따르면, 장기기증에 대한 오해와 부정적 인식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깊게 자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가에서 기증인 예우 차원에서 장제비 일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소문이 퍼지면서, 다수의 도너패밀리는 ‘돈 주고 가족을 팔았다.’라는 부당한 비난을 듣고 장기기증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경험은 유가족들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기고, 장기기증에 대한 회의감과 고립감을 심화시켜 심할 경우 대인기피증을 초래한 사례도 조사됐다.
이번 장기기증 캠페인에 도너패밀리가 직접 나서는 배경도 장기기증에 관한 편견을 완화시키자는 취지다. 올해 들어 두 번째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는 부부사별자 공점덕 씨(71세, 여)는 2013년 11월 4일 남편 故 정동수 씨(기증 당시 66세)의 장기기증을 결정해 3명의 생명을 살렸지만, 이후 장기기증에 대한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난 5월 본부가 주최한 장기기증 캠페인에 다른 도너패밀리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남편을 잃은 고통이 생명을 살렸다는 자부심으로 승화되는 것을 느꼈다. 공 씨는 “단순히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고 생명을 살리는 장기기증의 본질적인 가치를 알리기 위해 용기를 냈다.”라며, “장기기증에 관한 편견은 유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생명나눔에 대한 사회적 참여를 방해하고, 장기이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환자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일이다.”라고 전했다.
여전히 아픔 속에 있는 도너패밀리를 위한 심리지원 프로그램도 개강해
인식개선을 위한 장기기증 캠페인에 이어 오는 11월 7일에는 여전히 상실의 고통과 사회적 편견 속에 아파하는 도너패밀리를 위한 심리지원 프로그램도 개강한다. 4주간 진행되는 ‘도너패밀리 심리지원 프로그램’은 유가족의 심리적 치유와 건강한 애도 과정을 돕기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으로 서울특별시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7월 시작돼 올해 4회 차를 맞았다.
본부와 CCC순상담센터가 공동 개발한 해당 프로그램은 ‘첫 만남’, ‘슬퍼해도 괜찮아’, ‘나를 받아줘’, ‘너의 부분들을 위한 기도’ 등 유가족의 정서적 필요에 맞춘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기증인을 향한 감정을 깊이 있게 마주하고, 애도의 과정을 건강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지난해 국내 뇌사 장기기증인은 483명에 그쳤으며, 약 5만 1천 명의 환자들이 장기이식을 기다리다 매일 7.9명의 환자가 사망하고 있다. 이에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해서는 유가족에 대한 예우와 심리적 지원을 강화해 장기기증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본부는 2013년 뇌사 장기기증인 유가족 모임인 ‘도너패밀리’를 발족하고, 뇌사 장기기증 유가족의 심리지원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정기적인 장기기증 캠페인 지원 외에도 지역별 소모임, 이식인과의 1박 2일 캠프, 1일 추모공원, 문화 공연 및 전시회 진행, 유자녀를 위한 장학회 운영, 뇌사 장기기증 기념공간 건립 등을 통해 도너패밀리를 지원한다.
본부 김동엽 상임이사는 “장기기증 문화가 국내에 깊이 있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장기기증인과 유가족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며, “도너패밀리들이 이번 장기기증 캠페인 및 심리지원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기증인이 남긴 사랑의 가치를 마음에 품고, 건강한 미래로 나아갈 힘을 얻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