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곤 목사의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한국교회집단순교지(22) - 6인이 순교한 영광 법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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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18년에는 미국 남 장로교 선교회의 후원으로 20여 평의 ㄱ자형 예배당을 신축하여 예배드렸다. 1920년대 조선 시대의 동헌 터 아래 조선야소교 법성포교회가 초가로 된 예배당을 마련하고 예배와 야학을 겸할 만큼 법성교회는 복음 전파와 교육을 통해 지역선교와 문맹타파에 앞장섰으며 그러다 일제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다.

영광 법성교회 현재 모습
영광군에는 7월 23일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영광이 완전히 수복된 다음 해, 2월 20일까지 인민군 잔당과 빨치산(좌익)이 남아있었다. 숨어 있는 인민군 때문에 영광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천하였다. 그래서 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
순교한 김종인 목사의 딸 김덕화 권사의 증언에 따르면 부친은 1891년 해남에서 출생하여 평양신학교를 5회로 졸업하였다. “부모님은 근검절약하여 멀리서 오는 교인들을 먹이고 재워주었으나 자녀들에겐 인색했습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두 번이나 감옥에서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법성교회 이병화 목사와 필자
고인이 된 장기탁 장로는 “김종인 목사님은 피난을 떠나기 위해 배에 오르는 주민들을 끝까지 도와주시고 본인은 남으셨습니다. 인민군들에게 붙잡혀 계시다가 처형장 대사고개로 끌려갈 때, 인민군들은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김종인 목사님의 말을 막으려고, 양잿물 덩어리를 입속에 넣고 칼로 목을 쳐 죽였지요 순교하신 것입니다. 이 소식에 막내딸 김순화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와, 법성 읍내를 다니며 ‘공산당은 물러가라!’ 외치다 인민군에게 붙잡혀 신덕동 저수지로 끌려가 대창으로 온몸이 찔려 죽임당했습니다.” 라는 증언을 남겼다.
장기탁 장로도 여러 차례 잘 숨었으나 부인 송옥수 집사는 7살, 2살짜리 아이와 박옥남 집사, 김진복 청년 함께 전깃줄에 굴비처럼 묶여 인민군에게 끌려가 대덕산 아래 해수 둠벙(작은 저수지) 앞에서 대창에 찔린 후 둠벙에 버려졌다. 이때 여러 성도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김덕화 권사와 함께한 교인들
또한, 고창 덕암교회를 시무하셨던 이광연 전도사 부부와 두 아들이 법성포로 피난 나와 전도하다 붙들려 순교하였고, 영광읍 교회를 담임했던 원창권 목사와 조이성 부인, 그리고 11자녀 중 8자녀도 순교하였다. 영광 염산교회에서 77인, 영광 야월교회에서 65인이 순교한다. 한국전쟁에 남한의 6만 여명 민간인 사망자 중, 190명의 순교자를 포함, 21,200여 명이 학살당한 영광군이 가장 피해가 크다. 영광군은 순교 성지다.
김종인 목사의 가족으로는, 부인 신봉례 사모, 첫째 딸 김연화 권사, 둘째 딸 김덕화 권사(생존 96세), 첫째 아들 김선화 장로(교수), 둘째 아들 김철화(공산당에게 끌려감), 막내딸 김순화 (공산당에게 순교 당함), 셋째아들 김명화(6.25 충격으로 정신질환 앓음), 막내아들 김복기 집사(생존 77세) 등이 있다.

김종인 목사의 딸 김덕화 권사의 간증
김종인 목사의 외손녀 리수지 선교사는 순교의 신앙을 가지고 공산권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 2019년 2월 20일 순교자 김종인 목사의 둘째 딸, 김덕화 권사가(당시 만 95세) 법성교회에 와서, 선친과 동생의 순교 현장을 눈물로 간증했다. 고령임에도 뚜렷한 기억력으로 한국전쟁의 순교상황을 증언하였다. 법성교회 이병화 담임목사는 교인들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날마다 죽는 신앙을 계승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사도행전과 같은 교회’(행 2:46, 47)가 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