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스토리가 있는 김준곤 벽화’ 명소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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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와 생가 탐방하며 민족복음화와 대학생선교 부흥 기원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주도했던 김준곤 목사(1925-2009) 고향마을인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마을에 기독교인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다.
김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준곤목사기념사업회가 지난 10월 4일 폭36.6미터의 ‘스토리가 있는 김준곤 목사 벽화’가 완성된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독교인들이 벽화와 생가를 방문하고 있다. 벽화에는 해설판이 설치되어 있어 김 목사의 사역을 시대별로 살펴볼 수 있다.
벽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만에서 사역하는 변성진 선교사와 배인석 목사(함평 할렐루야교회)가 가장 먼저 그곳을 찾았다. 지난 10월 21일에는 평택순복음교회 강헌식 목사(평택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와 권사 40여 명이 방문했다.
10월 23일에는 김준곤목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으로 벽화 등 기념사업을 기획 추진하고 있는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문화체육관광부 백중현 종무관, 신안군청 문화관광과 이동건 예술팀장, 곽승혁 연구관, 전남교회총연합 박정완 사무총장,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안상기 사무국장 등이 방문했다.
또한 10월 31일에는 백석대 주도홍 전 부총회장을 비롯해 , 교수들이 부부 동반으로 ‘스토리가 있는 김준곤 벽화’를 감상한 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을 탐방한다.
김 목사는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48인 순교자 교회인 임자진리성결교회가 있고, 30분 거리에 증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이 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소악도 12사도 순례길을 걸으면서 신앙 묵상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진보 신학의 거장인 서남동 박사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려면 자은도 생가를 탐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김준곤 목사 기념사업이 잘 추진되어 순교와 선교의 섬 신안군 기독교 명소 탐방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1980년대까지만 해도 CCC 대학생들이 여수 애양원으로 순여행을 다녀왔다.”며 “이제는 이곳을 방문해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새롭게 다짐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백중현 종무관은 “민간 차원에서 기념사업을 추진해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만들어가는 것이 보기에 좋다.”고 말했다. 이동건 예술팀장은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과 연계한 기독교인들의 순례 코스로 주목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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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영 목사는 이날 지도봉리교회 최용호 목사에게 봉리교회를 김준곤목사기념교회로 지정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지도봉리교회는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교회로 김 목사가 1951년 4월 15일 첫 복음전파로 시작된 교회다.
또한 김 목사가 1973년 자신의 소유인 밭을 교회에 기부해 현재 예배당이 건축됐다. 김 목사의 모친 김통안 권사는 이 교회에서 1호로 권사 임직을 받았으며, 평생을 김준곤 목사의 사역을 기도로 지원했다.
한편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경기도 파주 금촌장로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정진 사모(초등학교 교사)와 어린 딸(은희)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10월 3일 인정진 사모는 순교를 당했고, 부친은 학살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김 목사 본인도 죽음 직전에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됐다.
생가 뒤편 선영에는 6.25 때 순교한 인정진 사모의 묘가 있다. 김 목사는 서거하기 1년 전인 2008년 4월에 순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1924년 10월 15일 생. 지도국민학교 교사 재직 중 담임 어린이들 주일학교 한 죄로 토착 공산당들에게 1950년 10월 3일 영광스런 순교를 했다. 슬하에 딸 김은희가 있고, 만주 마창에서 남편 김준곤 목사가 일본군에게 사형선교를 받고 도망해서 숨어 있다가 해방을 맞아 결혼해서 남편 고향인 원동으로 피난 왔다가 순교함. 서기 2008년 4월 일. 김준곤 목사 봉헌"이라고 쓰여 있다.
인정진 사모가 순교할 때까지 재직했던 지도국민학교(지도초등학교)는 김준곤 목사가 다녔던 학교로 2009년 6월 22일이 개교 100주년이었으니, 올해로 116년 된 학교다. 원동마을에서 지도초등학교까지의 거리는 7.5킬로미터이다.
김 목사는 인정진 사모 순교 후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목포 정명여중 과학교사로 재직 중이던 전효심 선생과 재혼하고 법성교회에 부임해 다시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광주서부교회(서현교회)를 거쳐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을 역임했다. 애양원 한성신학교 교수로 한 학기 강의 후 미국 유학을 갔다가 풀러신학교에서 빌 브라잇을 만나 1958년 한국CCC를 창설했다. 그리고 민족복음화운동을 주도했다. 그 뿌리가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마을인 셈이다.
